조선에 온 선교사 호주 매 氏 아십니까?
조선에 온 선교사 호주 매 氏 아십니까?
'호주 매씨 가족의 한국소풍이야기 전(展).'
수원 경기대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낯선 제목의 전시회 이름이다. 지난 9월 1일 시작해 내년 6월 16일까지 계속된다는 점도 특이했다. 호주 매씨. 잘 찾기 힘든 희귀 성씨지만 여느 희귀 성씨가 아니다. 본관이 호주이기 때문이다. 호주 출신의 귀화 가족이 이룬 일가다.
전시회에는 매씨 일가가 그동안 찍어온 한국의 일상 사진들이 전시됐다. 20세기 초반인 1900년대 사진도 담겨 있다. 지난달 21일 전시실에서 만난 이원우(60·수원 권선구)씨는 "매씨 선교사 가족의 2대에 걸친 한국 사랑에 눈물이 날 지경"이라고 전했다. 그는 관람 내내 흑백 사진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했다.
한국행, 그리고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
호주 매씨는 호주 국적 조선선교사 제임스 맥켄지(1865∼1956)의 본관과 성을 말한다. 매견시가 그의 한국 이름이었다. 매씨의 조선 선교는 부인 메리(1880∼1964)로부터 시작됐다. 메리는 25세 처녀의 몸으로 1905년 한국 선교를 자원했다. 그리고 맥켄지는 1910년 부산항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선교 현장에서 만나 맥켄지의 청혼으로 한국에서 결혼했다.
메리가 1905년 9월 26일 한국행 배 치난호 갑판에 앉아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정말 조선으로 가고 있는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나눠줄 수 있을까. 그래 하나님을 찬양하자. 그분은 나를 높이시며 나를 심부름꾼으로 나아가게 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내려주신 분이다.’
앞서 메리는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와 오르간 반주자로 봉사했다. 그리고 두 해 동안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한국행 배 안에서 만난 이들은 “결혼도 안 한 여자가 뭣 때문에 일생을 투신하려 하느냐”고 말했다. 어떤 의사는 “조선인은 식인종”이라고 악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1905년 5월 영국주재 조선공사 이한응이 일본의 주권침탈에 분개해 영국에서 자결했다. 영연방 호주에도 이 소식이 알려졌다. 그리고 그해 11월 17일 이완용 등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돼 대한제국의 외교권마저 박탈됐다. 조선은 멸망해가고 있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당시 맥켄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남태평양 바누아투에서 10년째 원주민을 상대로 선교 중이었다. 이 원주민은 식인종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성경을 현지어로 번역하고 우상과의 전쟁을 벌였다. 개종 원주민들이 살육을 당했고, 동료 선교사도 피살됐다. 첫 부인 마가레트 블레어 맥켄지는 1908년 흑수병으로 죽었다. 자신도 풍토병에 걸려 이듬해 철수해야 했다. 맥켄지는 건강이 회복되자 한국 선교를 서원했다.
한국 나환자들의 아버지가 되다
두 사람은 맥켄지의 뜻에 따라 부산 감만동에 나환자(한센씨병)촌을 조성하고 구제선교에 나섰다. 경남 진주를 중심으로 하루 수십㎞를 걸으며 복음을 전하던 메리는 나환자 자녀를 위한 집을 운영했다.
부부는 선교 보고를 위해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이 사진 9000여장은 딸들이 운영했던 부산 일신기독병원(옛 일신부인병원) 창고에 남았다. 이 중 사진 2000여장을 정리한 경기대박물관 배대호 학예연구사는 “1905년부터 전국 25개 지역에서 촬영된 매씨 가문의 사진은 민속학적 가치로도 훌륭하다”며 “매씨 부부의 큰딸과 작은딸이 부모유지를 이어받아 1970년대 말까지 한국을 위해 봉사했고 그들이 찍은 일상은 우리에게 역사 기록이 됐다”고 했다.
그 한 장면. 1905년 메리의 사진. 갓을 쓴 한 조선 노인이 근엄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작은 탁자의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양옆으로는 스코틀랜드풍 복장을 한 서양 여인이 책을 펴 읽고 있다. 노인은 조선 초대교회 장로 박신연, 오른쪽은 메리, 왼쪽은 호주 여선교사 엘리스다. 영어를 단 한마디도 못하는 박 장로에게 두 서양 처녀가 조선어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현지어를 알아야 복음을 전한다는 절박함이 묻어난다.
1910∼12년 무렵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사진. 비탈진 산자락에 초가를 배경으로 서양 선교사와 조선인들이 영연방 깃발 아래 단체사진을 찍었다. 서양식 창문을 낸 한옥 나환자병원 준공 기념사진이다. 조선인의 얼굴엔 호기심과 두려움이 드러나 있다.
‘오늘 난 두 명의 남성과 한 여성 나환자의 수용을 거절해야 했다. 수용인원이 넘쳐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종일 내 마음이 아프다. 7명의 남자와 3명의 여자가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줄 물병을 들면서도 정말 큰 영광이라고 느꼈다.’
‘여자가 다리를 약간 절며 우리 집에 왔는데 달걀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그건 우리 병원에서 나병을 치료받고 가져온 감사의 선물이었다. 우린 썩어가는 그녀의 다리 한쪽을 절단했고 의족을 만들어줬다. 18세 처녀였다.’
맥켄지 사역 초기 일기이다. 그의 나환자 사역은 1938년까지 계속됐다. 목사로서 1920년 중반까지 부산을 중심으로 13∼15개 교회 순회 목회를 겸했다. 지금의 부산 창대교회(옛 상애원)는 나환자선교에서 비롯됐다. 맥켄지는 나환자를 위해 의사면허도 취득했다. 아내 메리는 나환자 자녀를 돌보고, 부산진 지역의 여성을 위한 신앙교육에도 나섰다.
그런 부부가 은퇴해 39년 호주로 돌아가자, 나환자들은 맥켄지를 기념해 ‘한국 나환자들의 아버지’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선교사 어머니, 죽어도 보고 싶어요”
한 나환자 자녀는 호주로 돌아간 메리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어머니. 우리 구주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중에 평안하십니까.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나는 죽어도 어머니의 사랑을 못 잊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어머니께 영원하길 기도합니다.’
부부의 헌신은 6·25전쟁 직후 일신기독병원을 세운 딸 매혜란(헬렌·1913∼2009), 혜영(캐서린·1915∼2005) 자매에게 이어졌다. 부산에서 태어나 평양외국인학교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호주 멜버른에서 대학을 다녔던 그들은 의사와 간호사가 돼 한국에 돌아왔다. 부모를 이어 한국의 가난한 자를 돌보겠다며 1952년 한국전쟁 중 입국해 부산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한 것이다.
훗날 ‘살아 있는 성자’로 불리던 의사 장기려(1911∼1995) 박사는 혜란·혜영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분들은 결혼도 안 하고 한국인을 위해 일생을 바쳤어요. 호주 가서 은퇴해 살고 있는 그분들의 딸이 돼 주세요. 두 분에게 효도하고 부모처럼 모시기를 원해요.” 일신기독병원 간호조산사로 재직(1967∼72)했던 김영옥은 그 말을 듣고 호주로 건너가 두 자매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터지자 부산행 배 올라 ‘귀향’… 병든 자들 곁으로
호주 매씨家 두 딸 ‘살아있는’ 한국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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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사진
부산 일신기독병원 내 맥켄지역사관에 세워진 병원 설립자 매혜란·혜영 자매 흉상과 그들이 쓰던 오르간. 자매와 함께 근무했던 전정희(왼쪽) 전 화명일신기독병원장이 지난달 29일 서성숙 일신기독병원장과 함께 병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맥켄지 선교사 부부는 슬하에 혜란(헬렌) 혜영(캐서린) 루시 쉴라 네 딸과 아들 짐을 두었다. 모두 부산 태생이다. 짐은 두 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고, 현재 부산진교회 묘지에 묻혀 있다.
혜란은 1931년 평양외국인학교 졸업 후 호주 멜버른대학에 진학해 산부인과 의사가 됐다. 혜영은 평양외국인학교를 다니다 로열멜버른간호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자매는 1945∼50년 중국 운난성 쿤밍에 들어가 의료선교사로 봉직했다.
자매는 늘 ‘고향’ 한국으로 가고 싶어 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터졌다. 자매는 1952년 2월 13일 천신만고 끝에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들의 한국행에 대해 어머니 메리는 이렇게 썼다. “너희가 주님을 위해 새로운 임무에 용감하고 씩씩하게 가는 것을 보고 기쁨과 평안이 된단다.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지만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함이니라’는 성경 말씀을 새겨라.”
자매는 부산진교회 유치원 한쪽에 천막병원 ‘일신부인병원’을 개원했다. ‘그리스도의 명령과 본을 따라 불우한 여성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육체적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을 구현한다’는 게 설립취지였다. 이 정신은 일신기독병원, 화명일신기독병원 등을 통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9일 부산 좌천역 옆 일신기독병원 내 맥켄지역사관에서 두 자매와 의료활동을 같이했던 전정희(74·의사·부산 크리스탈여성의원 원장) 전 화명일신기독병원장을 만났다. 서성숙 일신기독병원장과 김범한 한·호기독교선교회 법인사무국장도 함께였다. 전 원장은 이화여대 의대 출신으로 1971∼75년 이 병원 수련의였다. 그리고 1981∼2007년 근무했다.
“76년 닥터 헬렌(혜란), 78년 캐서린(혜영) 선생님이 각기 은퇴하고 호주로 돌아가셨어요. 두 분 다 딱 가방 한 개뿐이었죠. 일신부인병원이 당시 한국 최고의 부인과 전문병원이었음에도 그들의 은퇴는 그렇게 조촐했어요. 맥켄지 선교사님은 딸들이 그렇게 돌아올 걸 예상하고 생전 두 자매를 위한 집 한 채를 남겨 놓으셨대요. 검소와 절약이 몸에 밴 분들이었죠. 훗날 한국 제자들이 호주에서 어렵게 생활하시는 게 안타까워 이것저것 보내드렸죠. 그런데 꼭 필요한 것만 쓰시고 나머지는 다 교회에 헌금하셨어요.”
1950∼70년대 한국은 가난했다. 가난 때문에 산모들은 병원비를 아끼려고 죽기 직전까지 버티다 병원을 찾았다.
“제가 수련의였을 때도 10분마다 수술이 진행됐죠. 연탄 트럭에 실려 멀리서 온 새카만 산모도 있었어요. 사경을 헤매는 환자와의 전쟁터였죠. 저는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닥터 헬렌은 분만을 유도하고 기도해요. 성자라고 할밖에요. 환자 10명 중 서너 명이 병원비를 낼 수 없는 형편이었어요.”
간호사 캐서린은 가난한 자들의 시름 속에서도 늘 밝게 병원 업무를 이끌었다. ‘니캉 내캉’ ‘와그라노’ ‘삐까번쩍’ 등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노처녀였다.
환자와의 전쟁이 끝나면 예배를 봤고, 예배가 끝나면 또 환자와의 전쟁을 치렀다. 이면지 아껴 쓰라고 직원을 혼냈지만, 수술비 안 내려고 환자를 응급실에 내려놓은 뒤 자신은 동네사람이라고 우기는 환자의 남편을 눈감아줄 줄 아는 자매였다. “어쩌겠니. 그래도 우리가 할 일이지”라고 했다.
“일생을 편히 살 수 있었던 분들이었잖아요. 말년을 남루한 요양원에서 보내시게 한 게 마음 아파요. 신앙 없이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분들의 유산인 일신기독병원이 미얀마 등 동남아의 가난한 이들에게 손 내밀고 있어요. 기도해주세요.” 전 전 원장의 말에서도 호주 매씨의 하나님 사랑이 절절히 배어 있었다.
부산=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