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30. 08:58ㆍ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
유일한 생명의 기독교 복음은 한국의 기독교도, 일본이나 중국의 기독교도 아닙니다 어떤 개인인 황제나 교황의 기독교도 아니고 단체의 기독교도 아니고 백인이나 황인종의 특정 인종의 기독교도 아니고 하나님의 기독교입니다 시대적으로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에 한 흭을 그을 수 있는 사건입니다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 평전 박응규 저(도서출판 그리심)
25. 신사참배 가결과정과 그 이후 (256-263p)
기독교 학교들에 신사참배를 강요해 나가면서 일제는 교묘하게 기독교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논리로 설득과 위협을 가중시켜 나갔다 이런 과정에서 선교사들은 학교 운영에서 제외시키고 완강하게 거부하는 학교들에게는 더욱 강한 압력을 가하면서 점점 반대 세력을 무력화(無力化) 시켰다 그러나 적지 않는 기독교 학교들은 설립취지와 본질적인 신앙의 원칙을 타협하면서까지 학교를 운영할 필요가 없다는 전제하에 자진 폐교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제는 그들의 신사참배 강요정책이 학교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음을 확인한 후에 교회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한국교회 전체를 향하여 전면 공격을 하기 보다는 반대 성향이 강한 목사들과 성도들을 중심으로 설득과 회유작업에 나섰다 이 정책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구금 및 체포하거나 고문을 가하는 등 갖은 핍박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이 정책은 그들의 기대했던 것만큼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일제는 일본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설득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들의 역할은 신사참배에 대하여 일본정부의 입장을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수용하도록 권고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일제는 한국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하도록 모든 압력을 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총회 전에 평양 경찰서장은 1938년 9월 2일 평양 시내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을 소집했다 그는 앞으로 있을 총회에서 선교사들은 이 문제에 관련해서 침묵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논쟁도 허락될 수 없으며, 황제의 모욕이 되는 그 어떤 안건에 대해서 결코 찬성투표를 허용할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또한 그 총회의 400여명이나 되는 총대들을 그들의 관할지역 경찰서에 미리 호출하여 신사참배 가결 제안에 찬성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삼엄한 경비와 위협속에 1938년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개최된 제 27회 한국 장로교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는데 이 때 방위량 선교사는 당시 총회장인 홍택기 목사에게 언권을 달라고 요청하여 그 가결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즉 신사참배 가결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법에 위배된다는 것을 역설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묵살 되자 방위량 외에도 권세열(Francis Kinsler)과 허일(Harry James Hill)등을 비롯한 10여명의 선교사 총대들이 동일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선교사들 역시 개인적으로 ,또 나중에 집단적으로 신사참배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는데 그것은 한국인들의 문제라는 이유에서였다 일제는 그 문제를 아예 논의조차 못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신사참배를 허용하자는 동의안이 제기되었을 때 일제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던 사회자는 그 동의안을 지지하는 내용 외는 발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회장 규칙이요!” 라며 살벌한 분위기의 적막을 깨뜨리고 한 젊은 미국 선교사가 소리 지르며 항거하는 일이 총회 석상에서 일어났다 장인인 방위량 선교사의 언권을 봉쇄하고 각본대로 신사참배 동의제청을 받고는 “부”는 묻지 않는 채 가결을 선포하려 할때에 피 끓는 젊은 선교사 한부선은 참을 수없이 외친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인 형사의 엎어치기로 한부선은 총회가 열렸던 예배당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수모를 겪으며 끌려 나갔지만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그의 신앙은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기만 하였다 그 이후 한부선은 환난과 핍박 중에도 순수한 신앙을 지켜 나가려는 한국인 성도들과 서양의 기독신자들에게 “한국의 엘리야”로 각인 되었다
1938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조선과 만주 27개 노회의 총대 193명(목사 86명, 장로 85명, 선교사 22명)이 모여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개회 당시 총회장은 이문주 목사(경북노회·대구남산교회)였다.
첫날 저녁 8시에 개회하여 임원을 선출하니 총회장으로 평북노회 홍택기 목사가 선출됐다. 이튿날 오전 9시 30분 속회하여 박응률 목사로 기도하게 하고 회무를 시작한 후 1시간이 지나서 10시 50분경, 평양노회장 박영률 목사가 평양노회, 평서노회, 안주노회의 연합대표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는 제안을 하여 즉시 가결하였다.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한다“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후(銃後)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한다. 소화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회는 신사참배 가결 후 후속조치로 부총회장과 각 노회장이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를 참배할 것을 결정하여, 12시 정회 후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와서 오후 2시부터 속회했다. 평북노회는 총회 개회 이전인 1938년 2월에 이미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전북노회도 6월 8일 제32회 정기노회 중에 가결하였으며(‘전북노회록’ 참고), 경북노회는 8월 19일 제36회 2차 임시노회에서 신사참배하기로 가결하고 이에 찬성하는 회원들을 총대로 선정하였다(‘경북노회105년사’ 참고).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제 27차 신사참배 결의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권찬영 목사를 비롯한 25명은 “총회의 결의가 하나님의 계율과 조선 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위반될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 발언을 허하지 않고 강제로 회의를 진행한 것은 일본 헌법이 부여한 선교자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라는 취지의 항의서를 전달하였다 또한 선교사들도 총회 직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항의서한을 제출하였다
한위렴이 작성한 이 항의문의 내용은 첫째로는 신사참배 결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며 둘째는 총대들이 어느 안건에 대해 반대의사를 개진하며 반대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봉쇄한 것은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과 규칙에 명백히 어긋나는 것이고 셋째는 강제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하는 것은 일본헌법에 보장한 종교의 자유를 위반하는 처사이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처사는 보통 회의법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것임을 언급하였다
이러한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의 계흭대로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통한 한국민의 황국신민화와 교회의 신앙을 훼절시키는 작업을 그대로 진행시켜 나갔다 평양 기독교 친목회 회원인 심익현 목사는 총회원들이 즉각적으로 신사참배를 실행할 것을 특청하였고 부노회장이었던 김길창의 인솔하에 전국23개 노회장들은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 신사에 참배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교의 총회의 이러한 결의는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긴 했지만 신사참배 가결을 불법적으로 결의하게 된 것은 교회가 교회로서의 하나됨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며 앞으로 계속되는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신사참배 문제는 그 당시의 단회적 사건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처리문제로 인하여 한국장로교회의 본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최후까지 버텼던 장로교회가 허물어진 상태에서 장로교회의 핵심이요 교역자 양성의 본산지인 평양신학교에서도 신사참배에 대한 태도가 찬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938년 봄 노회부터 신사참배 결의를 강요하고 당시 교세가 가장 강했던 평북노회부터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교수들과 학생들은 이를 성토하였다 이 노회소속 신학생이었던 장홍련은 신학교 교정에 있는 김일선 목사의 기념식수 벌목사건을 계기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준비하다가 한창선, 김양선, 안광국, 장윤성, 지형순, 조윤승, 장윤홍, 등의 신학생들과 박형룡교수가 함께 검속 투옥되었다 평양신학교의 한국인 교수이었던 박형룡과 이성휘 등은 신사참배 강요정책에 반대했지만 채필근, 김관식 등은 교회와 학교는 분리되어야 하며 종교는 문부성에서 신사는 내무성에서 관장하니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고 강변하였다 신사참배를 찬성한 이들은 후에 친일 교단의 선봉에 서서 비신앙적이고 비민족적인 일에 앞장서게 되는데 이것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당시 평양 신학교 재학생이었던 이인재는 “당시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평양 신학교에 다닐 때 나와 많은 동료들은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모두 투옥됐다”고 증언함으로 거의 모든 신학생들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당시 학생 수는 모두 108명이었고 전쟁이 일본에게 불리한 국면으로 전개되는 때인 만큼 그들의 학정은 날로 가혹해져 갔고 죄없는 죄수들은 감옥에서 하나 둘 죽어나가기 시작했다고 회고하였다 그 때 신학교 재학생들의 성분을 보면 과거 교직원 혹은 공무원직에 있었던 자들은 비교적 반일 감정이 강했고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자들로서 “모두가 항일 투사들”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은 조직 신학자 구례인 박사와 변증학의 권위자였던 함일돈 교수의 가르침에 큰 감화를 받고 있었다 “위주(爲主) 수난이 최고 영광”이라고 간주하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동참했던 이인재는 1940년 5월 13일 일본 관헌에 의해 체포되어 195년 8월 17일에 출옥하기까지 5년 4개월 동안 옥중에서 순수한 신앙과 민족을 향한 사랑을 지켰던 인물이었으며 말년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보내다가 2000년에 소천하였다
한국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한 이후 교회의 신앙적 변절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처절하게 진행되었다 1939년 한경직이 목회하고 있었던 신의주 제 2교회에서 제 28회 장로교 총회가 열렸는데 그 총회에서 윤하영이 총회장에 선출되고 신사참배 가결못지 않게 치욕적인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이 결성되었다
“신사참배가 의례적인 것이라면 ‘총동원 연맹’은 보다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 연맹의 이사장은 총회장 윤하영이 맡게 되고 총 간사는 정인과 목사가 맡게 되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가담한 중에 프린스톤 신학교에 유학했던 한경직과 송창근, 그리고 김재준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신학적 입장과 사역사이에는 일관성보다는 현실에 순응하는 경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프린스톤 출신 가운데 박형룡과 한부선 같은 이들에게는 신학과 사역에 분명한 일치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한 인물의 사상은 그것을 수용한 기질과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행동을 낳게 되었다
신사참배 문제는 일본의 통치 기간뿐만 아니라 1943년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에 매우 중요한 요소였으며 이 문제에 대한 시각의 차이가 결국은 교단내의 신학적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는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신사참배 강요정책은 일제 식민통치의 수단으로서 세속권력을 절대화하는 우상숭배에 관련되는 것이며 하나님위에 인간을 신성화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중요성은 기독교 신앙 그 자체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민족보전의 순수한 관점에서도 추적될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신사참배 강요정책에 저항 하면 할수록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한국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데에 크게 기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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